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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시인 김관식

다사광야에 김관식

다시광야에 김관식(金冠植)
자료출저 : 논산문화원에서 발행한 논산문화 2004 신년호 통권 제90호
충남문협부회장 권선옥 선생님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진 천재 시인 김관식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진 천재 시인 김관식의 묘비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진 천재 시인 김관식의 묘비

시인 김관식, 가는곳마다 엄청난 회오리와 천둥 번개가 함께 했던 사람. 고등학교 시절에「성리대전(性理大典)」을 떼고, 스물 미만의 나이에 최남선·오세창 등에게서 성리학과 동양학을 사사(私事)한 천재 소년. 스물두 살에「현대문학」추천으로 시인이 된 사람. 우리 나라는 너무 좁다며 문패만한 명함에 대한민국 아무개라고 써 들고 다니던 사람. 문단에서의 기행으로 너무 유명하여 오히려 그의 문학적 성과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슴에 불을 담고 광기어린 행동으로 짧은 생을 살다간 시인으로만 치부되기엔 그의 문학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가 세상을 향해 퍼부은 독설은 너무나 또렷하다.
김관식 시인은 1934년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 505번지에서 김낙희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룡리 마을은 육군훈련소와 인접한 마을이다. 당시로서는 논산군 구자곡면(九子谷面) 소재지에서 2Km정도 떨어진 산 밑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이고 앞으로는 시내가 흐르는 배산임수의 마을로, 한때 200호에 육박하는 큰 마을이었으나 여느 농촌마을이 그렇듯 군데군데 빈집이 늘어 마을은 예전에 비해 크게 작아졌다. 당시의 가족 제도가 그렇듯이 김낙희 씨는 아버지를 모시고 형제가 한 집에 사는 대가족이었다.

세 살 무렵, 아버지가 강경에서 장춘당한약방을 경영하게 되어 강경으로 이사한다. 그 뒤 강경중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당대의 명문이었던 강경상업학교에 입학한다. 학교 공부가 별로 달갑지 않았던 그는 강경상업학교를 중퇴하고 남한 각지를 떠돌며 문인들을 만나고, 성리학의 마지막 법통이라 일컸던 최병심을 찾는다.

또 전주에 피난 와 있던 서정주를 만나 문학에의 열정을 불태우는 한편 서정주의 처제인 방옥례를 보고 연정을 품게 된다. 그리고 전주의 전시 연합 대학에서 청강을 한다. 1952년에는 충남대학에 입학하였다가 고려대학교로 전학한다. 또 처녀 시집「낙화집(洛花集)」을 간행한다.

1953년 다시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전학하고, 최남선, 오세창 등에게서 성리학과 동양학, 서예 등을 사사받는다. 이듬해 3년간이나 구애를 하였던 방옥례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다. 그 해 봄에 경기도 여주농고 교사로 부임하였는데 이 때부터 연이은 과음이 시작된다. 다음 가을에 서울공고로 옮긴다. 여주농고에서의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어느날 과음한 뒤에출근한 김관식을 교장이 부른다는 소리를 듣고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은단을 한 줌 입에 털어 넣었다. 술 냄새에 은단에 범벅되어 그의 입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났다 교장은 몇 마디 말을 주고 받다가 그에게 말했다.

"김관식 선생, 나는 은단 냄새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술 냄새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은단과 술이 짬뽕된 냄새는 아주 싫어합니다.?"
그 선생에 그 교장이랄까, 아주 유머가 넘치는 장면이었다.

파란의 여주농고 생활을 접고 가을에 그는 다시 서울공고로, 그리고 다음해에는 또 서울상고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구기동 산골짜기로 이사하여 과수원을 경영한다. 이 해에 창간된 『현대문학』에「연(蓮)」,「계곡에서」,「자하문 근처」의 작품으로 서정주로부터 6개월만에 3회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한다.

천재시인 김관식의 물이흐른다

천재시인 김관식 묘비

1957년에 자유세계사에서 「김관식 시선」을 발간한다. 1959년에는 학생들과 왕왕구락부를 만들어 보신탕을 먹으러 다니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다. 서울상고를 사직하고 세계일보 논설위원으로 부임한다. 그의 방랑벽은 멈추지 않아 이듬해 다시 세계일보를 사직한다. 그리고 용산에서 민의원에 출마하여 당시 거물 정객이었던 장면과 겨루었다. 선거 중에 아버지뻘이나 되는 장면을 '군'이라고 호칭하여 또 화제가 됐다. 그러나 결국 그는 낙선하고 말았다. 이 무렵부터 결핵과 위장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가나긴 투병 생활에 접어들게 된다.
그는 경영하던 과수원을 처분하고 서대문구 홍은동 산1번지로 이사하여 무허가 건물을 지어 파는 등 기행을 일삼는다.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려 하자 그는 지붕 위에 올라앉아 철거를 방해하면서,

그는 경영하던 과수원을 처분하고 서대문구 홍은동 산1번지로 이사하여 무허가 건물을 지어 파는 등 기행을 일삼는다.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려 하자 그는 지붕 위에 올라앉아 철거를 방해하면서,

"내가 장면과 겨루었다고 나를 이렇게 탄압하다니……. 이건 정치 탄압이다..?라고 외쳐 사람들의 실소케 했다.

홍은동 시대에 수없이 많은 일화를 남기며, 연이은 과음과 기상 천외한 행동으로 그의 아내를 한없이 슬프게 하기도 했다. 그는 술 때문에 생긴 병을 이기기 위하여 주전자를 천장에 달아매 놓고, 송주문(送酒文)을 써 붙이는 등 나름대로 술을 끊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이렇게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도 그는 한문 실력을 발휘하여 '서경'을 번역하여 간행하였으며, 작품 활동도 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대전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형을 찾아 살길을 구했으나 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대전에서 2개월여의 투병 생활을 끝에 서울로 다시 돌아갔다. 이 무렵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향하여 죽음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쓰기도 하여 지켜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천재시인 김관식의 -「나의 임종(臨終)은」일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담담했으면서도 오랫동안 무관심했던 자녀들에 대해서는 강한 애정을 느꼈던 듯하다. 그는 자녀들을 향해 회한이 가득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시를 남겼다.

천재시인 김관식의 -「병상록(病床錄)」전문

그는 1970년 8월 30일 간염으로 타계하여, 그가 태어난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 마을 입구에 있는 사천 김씨네 종산(宗山)에 묻혔다. 그의 사후에 창작과 비평사에서 시전집「다시 광야에」를 간행하였다.

살아 생전, 이 좁은 땅덩이에 태어난 것이 한이라고 명함에 그저 '대한민국 김관식'이라고 써 가지고 다니던 시임 김관식은 말없이 누웠다. 그의 묘지는 생가에서 50미터 떨어진 곳으로 그가 뛰놀던 마을과 잇닿아 있고 불과 5∼6미터의 거리에 읍내로 통하는 2차선 도로가 있다. 가끔 인근의 사격장에서 총성이 들려와 무료한 일상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던 그를 깨운다. 앞에는 그가 여름마다 첨벙거렸을 냇물이 흐르고, 그가 바라보던 들판이 예전 그대로이다. 그는 뒤늦게 고향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복을 누리고 있다.

김관식 시인의 시 세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원시적인 생명의 강렬함이다. 추천작인「연」이나「계곡에서」같은 작품들은 낮은 어조의 서정적인 목소리를 보이고 있으나, 사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목소리가 격앙된다. <해가 떨어지면⁄ 목구멍에 타오르는 불길을 뽑아 바닷물이 들끓도록 울어라…….울어…….⁄한쪽 가슴엔 칼을 지니고⁄ 또 한 가슴엔 숫돌을 지녀 남몰래 밤낮 없이 갈고 갈아서⁄ 만나는 원수마닥 산멱을 찔러 쏟아지는 피를 마시어 목을 축이고⁄ 백년 삼만 육천날을 울음으로 새우리라.⁄ 오! 타고난 이 설움을 낸들 어이하리야.⁄ 어이하리야.>(「통곡」)에서 볼수 있듯이 그의 시는 원시적이고 강렬한 생명 의식을 담고 있다.

둘째, 상고적(尙古的) 세계를 향한 낙원 의식(樂園意識)이다. 동양적 전설과 세계, 사라져 가는 풍물에 대한 애정이 보인다. <욕심없는 나라의 백성이 되어⁄ 흰 무명옷을 정갈히 갈아 입고> <농사짓는 일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소박한 태고적으로 저만치 썩 물러나 어리석게 살리라.⁄ 시비 없는 세상에 시비 없이 살다가 시비없이 가는 것이 소원이어니.>(巢父許由傳)와 같이, 여러 시에서 현실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낙원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동양적 윤리관과 가치관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의 한 방법인 것으로 생각한다.

셋째, 소외(疏外)와 자존 정신이다. 현실에서 소외감을 짙게 드러내면서도 자존 의식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70년을 안 가서, 얼먹은 질그릇 깨지듯 하는 그⁄ 알량한 부귀도 영화도⁄ 歡樂과 奢侈도…….> 부질없는 것이라고 폄하하거나(「守錢奴에게」), (내게는 아무도 없네⁄ 반겨 맞아 줄 고향도 집도.>(「이 가을에」)라는 진술에서와 같이 현실 세계에서의 소외감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白金 도가니에 넣어 鍛鍊할수록 훌륭한 寶劍이 된다>(「病床錄」)고 자존 의식을 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기개는 그가 젊어서부터 동양 사상에 심취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김관식 시인이 세상을 뜬지 서른 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그리움 속에 자리하고 있는가는 그의 시비가 세 곳에 세워져 있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1992년에는 대전·충남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대전 보문산 공원에, 그를 흠모하는 강경상고 후배들에 의해 강경상고 교정에 각각 시비가 새워졌다. 1997년에는 당시 전일순 논산시장의 배려로 그의 고향 논산시민들에 의해 논산공설운동장 옆에 박용래 시인과 나란히 시비가 세워졌다. 시비 제막에 맞추어 박용래·김관식 시비 제막 기념문집인 「땅에도 별이 뜬다」(권선옥 편저)가 간행되었다. 한 시인의 시비가 세 곳에 세워져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여유를 모두 보상받고도 남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비에는 (「거산호」)가 새겨져 있다.

천재시인 김관식의 -「나의 임종(臨終)은」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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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6-10-28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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