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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시인 박용래

소설 눈물의 시인 박용래의 발자취를 찾아

소설 "눈물의 시인" 박용래의 발자취를 찾아 - 이 문 구 -
군자와 군자는 비록 세월이 다르되 길이 같고, 소인과 소인은 세상이 달라도 역시 한 무리일 뿐이라는 옛말이 있다.
인간이 물질에 대해서는 제법 인간다운 행세를 하면서도, 한 어리인 인간에 대해서는 짐승 노릇이 도리인 줄로 아는 세상을 지금으로써 증명하니, 옛말이 도리어 오늘에 이르러 그 뜻이 나타났음은 실로 딱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분수를 가늠하여 삶의 줏대로 삼고, 타고난 숨이 다되면 하릴없이 자리를 뜨되, 일생을 지녀온 고운 얼까지도 남에게 물려주고 가던 대인(大人)이 드물지 않았음을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런 난세에도 하늘은 높으나 고개를 숙여야 하고 땅이 넓어도 길이 아니면 얼씬을 말아야 한다고 이르던 한 아름다운 이가 있었다.

박용래 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살아서는 그의 작품을 모르던 이가 없고, 죽어서는 그의 이름을 지울 이가 없을 터임에 세상은 그를 일컬어 시인이라 한다.

일찍이 "배추씨처럼 사알짝 흙에 덮여 살고 싶다"고 했던 그는, 꽃그늘과 풀그늘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능히 알면서도 셈은 남과 같지 않았으니, 마침내 몸소 자기 곳을 찾아 오십추(五十秋) 남짓 되는 생애를 초야에 묻혀 다하였다.

그는 조상 적 이름의 풀꼿을 사랑하여 풀잎처럼 가벼운 옷을 입었고, 그는 그보다 술을 더 사랑하여 해거름녘의 두 줄기 눈물을 석잔 술의 안주로 삼았다. 그는 그림을 사랑하여 밥상의 푸성귀를 그날치의 꿈이 그려진 수채화로 알았고, 그는 그보다 시를 더 사랑하여 나날의 생활을 시편(詩篇)의 행간에 마련해 두고 살았다. 그는 나물밥 30년에 구차함을 느끼지 않았고, 곁두리 30년 탁배기에도 아쉬움을 말하지 않았다. 달팽이집이라도 머리만 디밀 수 있으면 뜨락에 풀포기를 길렀고, 저문 황토길 오십리에도 달빛에 별발이 어리면 뒷덜미에 내리던 이슬조차도 눈물겹도록 고마워하였다.

아아,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오지 않을 하나뿐인 정한(情恨)의 시인이여. 당신과 더불어 산천을 떠난 그 눈물들, 오늘은 어느 구름에 서리어 서로 만나자 하는가.

박용래 시인 사진
생전의 박용래 시인

박용래 시인은 1925년 음력 정월 14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 중앙동에서 밀양 박씨 가문의 3남 1녀 중 늦동이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원태(朴元泰)씨가 고향인 부여군 부여면 관북리 70번지에서 소지주(小地主)의 넉넉한 살림을 대강 정리하여 강경으로 나온 것은 자녀들의 교육에 남다른 열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말의 유생(儒生)으로서 한학과 한시(漢詩)에 일가를 이룬 것으로 원근의 유림(儒林)에서 일러온 터였지만, 평양·대구와 더불어 전선(全鮮)의 3대시장으로 꼽힐 만큼 육운과 수운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로로서 그리고 내포평야(內浦平野)의 농산과 금강으로 올라온 새로운 문물의 교역처로 중부 이남의 상권을 흔들던 강경에 발판을 다지려 했던 것은, 개화기에 따른 의식이 남보다 뒤지지 않았던 결과였다.

박용래 시비
박용래 시비

박용래 시비 금강을 대문으로 삼고 논산천과 강경천을 옆에 두어 삼남(三南)의 보고(寶庫)로 불리던 내포평야는, 미맥 위주의 주곡을 비롯, 모시와 해산물의 집산지로서도 조선시대이래의 큰 장이었다. 더욱이 강경상업학교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던 명문이었다.

박원태·김정자(金正子)씨 부부는 중앙동에 정착하자 봉래(鳳來)·학래(鶴來)·홍래(鴻來)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는 한편으로 막내둥이를 낳았고, 봉황과 학과 기러기의 날개 항렬보다 좀더 상서로운 영물을 찾아 부르니 그것이 곧 용래라는 이름이었다.

홍래 누나와의 추억이 있는 놀뫼와 나루
홍래 누나와의 추억이 있는
놀뫼와 나루

홍래 누나와의 추억이 있는 놀뫼와 나루 저녁 노을이 유난히 짙어 놀뫼(黃山)라 부르던 채운산(彩雲山) 산자락과 부여를 잇는 놀뫼나루, 황산천과 황산교, 죽마(竹馬)를 타고 오르내렸던 서편의 옥녀봉(玉女峰)들은 뒷날 민요풍(民謠風)의 그윽한 가락을 홀로 읊게 될 한 시인의 어린 시절을 건강하게 키웠다.

홍래 누이는 막내가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하고부터 한시도 딴전 볼 겨를이 없었다. 부모가 연만한데다 하나뿐인 누이를 누구보다도 옴살로 따랐기 때문이었다.

박시인은 홍래 누이를 따라 변두리로 다니며 노는 일이 잦았다. 채운산 너머 부투골, 낭청이, 까치말과 채운들 저쪽의 용답급, 돌꽃메, 두테골, 거름실 등 그들 오뉘의 발길이 미치지 않던 곳이 드물었다.

눈물의시인박용래의 난

시「마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놀뫼와 나루, 논티(論山)의 들녘들은 그로 하여금 자연과의 일체감을 처음 터득하게 했던 본바닥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시의 씨앗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씨앗들은 뒷날 대싸리, 모과, 능금, 이끼, 달개비, 민들레, 엉겅퀴, 캥이풀, 목화다래, 상수리, 수수이삭, 미루나무, 원두막, 바자울, 쇠죽가마, 잉앗대, 횃대, 멍석, 모깃불, 성황당, 옹배기, 목침, 베잠방이, 얼레빗, 실타래, 옥양목, 까마귀, 동박새, 반딧불, 베짱이, 소금쟁이, 물방개, 버들붕어, 메기, 쏘가리 등 우리 겨레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시어(詩語)로 영글어 양기 바른 두메의 붙박이 정서를 자아내게 된다.

홍래 누나와의 추억이 있는 논티의 들녘
홍래 누나와의 추억이 있는
논티(論山)의 들녘

그는 강경상업학교에 입학을 했던 1939년의 1학년 초엽부터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띌 만큼 여러 가지로 남다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는 전과목의 우등생이었을 뿐 아니라 품행에서도 남의 본보기로 마땅하였으며, 특히 미술에서 재질을 드러내어 미술반장의 구실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강경상업학교는 그의 생애를 가름했던 가장 중요한 고비의 어설픈 체제였다. 사춘기의 꿈과 낭만을 지레 접어버린 것이 이때라면, 실의와 허무감의 동거인으로서 시련에 의한 타율적인 성장을 이룬 것도 그때였다. 주산(珠算) 우위의 상업적인 교육에서 한몸에 촉망을 모으고도 비상업적인 관심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소질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전교의 수석 졸업생, 학교를 대표하던 정구선수, 구령 한마디로 전교생을 거느렸던 대대장 등 공인적인 위치를 떠날 수 없었던 학창 경력들도 무릇 위임사항에서 그쳤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속에서도 정신적인 숙성을 부추긴 것은 문학이었다.

장터에서 일어나 시림(詩林)이 되기까지, 그의 연보(年譜)에서 누구도 누락시킬 수 없는 사건은, 동기(同氣) 이상의 이상적인 여인상이었던 홍래 누이와의 갑작스런 영결(永訣)이었다.

놀묏내 건넛마울(부여군 세도면)로 시집을 갔던 홍래 누이가 초산의 산고로 이승을 뜬 것은 아무래도 너무 이른 2학년 어름이었다.누이와의 사별은 그의 여러 작품에 떨리는 가락으로 스며 있을 정도로 여운도 긴 아쉬움이었다.

눈물의시인박용래의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그의 시들은 남의 추측을 불허할 만큼 세필(細筆)에 의한 소묘로서 전위적인 추상(抽象)마저도 원천적으로 포괄하지만, 가을 하늘의 가장 분명한 사건인 기러기떼의 이미지를 통하여 기러기처럼 왔다가 기러기같이 날아간 숙명적인 이름 '홍래'의 애도로 이해할 경우, 보다 가급적(可及的)인 정한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눈물의시인박용래의 담장부분

홍래 누이를 묻으면서 비롯된 허무감은 활달하고 숫기 있던 본래의 성격까지 문득 내성적인 규모로 다듬어 보아 서정적인 품위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는 자기도 모른 사이 삶에 대한 회의, 신불(神佛)에의 불신임, 그리고 개체적인 고독과 사사로운 우수의 늪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었다.

박시인은 70년대 말기부터 차츰 고향으로 발걸음을 하였다. 산업시대와 함께 내리막길을 치달려 장터로서의 위신을 잃어버린 강경―그는 바야흐로 기울어가는 고향의 낙조(落照)에 착잡한 감회를 느꼈다.

"밀물에/슬리고//썰물에/뜨는//하염없는 갯벌/살더라, 살더라/사알짝 흙에 덮여/목이 메인 백강 하류(白江下流)/노을 밴 황산(黃山)메기/애꾸눈이 메기는 살더라,/살더라."(「黃山메기」전문)

고향에 남은 옛것은 산업시대의 공해에 병들어 생태변화를 일으킨 불구의 메기였다. 이 "노을 밴" 불구의 메기는 누구인가? 초로(初老)에 접어든 시인의 뒷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1982년 2월 7일. 나는 작가 강순식(姜順植)씨와 더불어 박시인의 추모여행을 하였다. 이날은 바로 박시인의 생일이기도 하였다.

욕쟁이 할머니네 골목
욕쟁이 할머니네 골목

보름나물과 부럼을 맷방석마다 늘어놓은 중앙동은 이제 변두리로 변해 '구장터'로 불리우며 오가는 이가 드물었고 "저축예금에 이율 대폭인상! 하루만 맡기셔도 100만원에 400원이자!"라고 씌인 농협의 현수막만이 초라한 색깔로 너펄거릴 뿐이었다.

갈숲이 어지러이 나자빠진 위로 시커먼 생활 폐수가 흐르는 황산천 위의 황산교 옆에는 일찍 깃들이 한 까치둥지가 그 위의 낮달과 한 쌍이 되어 강바람에 흔들리고, 황산천둑에는 가을에 못 치운 새우젓·황새기젓 드럼통이 시뻘겋게 녹슨 채, 켜켜로 앉은 먼지에 묻혀 긴 겨울잠을 들고 하는 말이 없었다.

그 놀묏내를 따라가면 서창동 서편나루, 그곳은 나루가 아니었다. 좌초된 폐선들이 겹겹이 누운 조각배들의 공동묘지였다.

칠산 앞바다의 조기와 흑산도 홍어로 만선을 한 중선들이 금강을 메웠던 북옥항(北玉港), 그러나 오늘은 오염된 메기와 붕어를 건져내는 그물들이 해설픈 서녘 하늘에 기대어 시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시인의 옛동산 옥녀봉(玉女峰)은 그래도 아직 그 모습이 남아 여남은 그루의 고목과 오막살이 초가 예닐곱 채를 벼랑 아래에 감추고 있었다.

옥녀봉 발뿌리의 북옥 선창에는 닻줄 내린 목선이 스무남은척, 마상이(통나무배)보다 너를 것 없는 잉어낚배들도 붉어가는 노을에 젖어 취한 듯이 뒤뚱거렸다. 거룻배가 강심을 헤치는 위로 갈매기의 활갯짓이 어지럽고, 넝마처럼 흩어진 잔설 무더기를 스치며 강아지 두어 마리가 바삐 달렸다.

"여보, 구장터 욕보네 집이 워디다요?"

종일 두고 벌은 것 톡 털어 탁배기 한 장으로 얼근해진 번데기 장수더러 강순식씨가 물었다.

"욕쟁이 여편네 찾소? 따러오유."

질어터진 골목을 외오 도니 술집 서넛이 의좋게 마주보고 있었다. 박시인이 자주 다닌 곳은 가운데의 서산집. 영업허가증을 흘끔 보니 주모의 이름은 박종선. 논묏들 조선감자같이 우둥퉁한 몸매에 파뿌리를 인 여인, 욕쟁이는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자기 또래의 아낙네와 소주를 홀짝이다 말고

"워디서 투가리 같은 것만 두 것이나 온댜?"

하며 우리를 마뜩찮다는 듯이 쳐다본다.

"투가리 같은 게 뭐요. 황산벌 배추꼬리마냥 미끈한 미남더러……"

"미남? 장마에 밀려와서 미남이냐?"

"어여 술이나 주셔. 늦이면 옆댕이 옴팡집으루 갈랑께".

"옴팡집에 가서 옴팍 빠져 뒈질 놈……제 발루 기어온 놈이 맨입으로 가는 꼴 못 봤다. 냄의 집 새끼들 걷어 멕이다가 나만 버렁빠지겄당께."

주모는 마치 동냥아치에게 공술이라도 주는 양 계속 걸게 씨월거렸다.

"그런디 늬덜은 워디서 뭣 땜이 온 것들이냐?"

"사람 좀 찾아보러 왔시다. 글 쓰는 사람……"

"이런 무식헌 것들……글씨 쓰는 늠은 대섯방에 가야 있지."

"성은 박씨고……시인이오."

"시끄러, 작것아. 시인은 가고 시러배들만 싸가지 ?R이 뫼여든당께."

"그러지 말고 박시인이 와서 놀던 얘기나 해보시라니까요."

"이런……술집에 오너(와서) 술값 빼구 갈라는 잡늠두 다있네."

하고 주모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박시인이 시낭독하던 시늉을 한자락 펼쳤다.

"꼭 애들 같인 사램이지……늙은 애기여……저 옥녀봉이랑 놀묏나루를 가리키며 이러구 저러구 해쌀 때는 영낙없는 철딱쉥인디, 그래두 이런 세상에 그런 이를 워디서 귀경허겄냐?"

주모는 강경읍내의 마지막 유물이기가 쉬웠다. 박시인은 이 주모를 통하여 자기 세대의 잔영(殘影)을 음미했을 거였다.

- 구 장터 욕쟁이네 배추가 몇단 놓여 있다 -

얼마 후, 우리는 대전행 직행버스에 허전한 몸을 실었다. 횡산벌로 치달리는 버스를 따라 열나흘 강경 달이 추위도 잊은 채 공연히 뒤쫓아오고 있었다. 들판에서는 논두렁에 쥐불을 놓는 조무라기들의 불깡통이 어려서 본 도깨비불처럼 허공에서 맴돌고 있었다. 추억을 돌리는 그 불꽃들은, 놀뫼에 비껴 있던 저녁놀보다도 훨씬 붉어 보였다.

박선생은 나에게 마지막 엽서를 보낸 지 20일 만인 11월 21일 오후 1시, 당신이 늘 "어둡기 전에 떠나야지"했던 대로 한낮에 영면을 하였다.

기브스 한 다리로 택시를 불러 교통사고나 났던 도마동 로터리를 한 바퀴 돌아보고 들어와 이내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었다.

아아, 그리하여 시인은 갔다. 산문을 써도, 편지를 써도 시로 씌어졌던 천생의 시인은 갔다. 주옥 같은 작품들을 백세의 유산으로 남겨놓고 어둡기 전에 갔다.

경부고속도로와 백마강의 한 줄기가 나란히 내려다보이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삼괴리 천주교 묘지 양지바른 언덕에, 선생의 유택은 오늘도 한 편의 시처럼 풀꽃을 가꾼다.

충남문인협회장으로 모신 영결식은 조남익 시인의 사회로 약력보고(金大炫), 추도사(崔元圭), 고인의 시낭독(朴成龍), 조시(任剛彬), 분향(朴在森, 朴喜익, 신태주, 신정식, 이문구……)의 순서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그리움에 다함이 없어 이 행장기를 짓는다.

게재된 내용 및 운영에 대한 개선사항이 있으면 담당자에게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최종수정일 : 2016-10-28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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